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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장면, 김종영 미술관, 서울

‘직관의 자유’를 얻기 위한 출발

2025년 오늘의 작가로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을 나무로 깎고, 채색해서 재현한 작품으로 익숙한 백연수 작가를 초대했다. 2019년 개인전 이후 6년 만에 개최하는 개인전으로 이번 전시 제목은 <끝나지 않은 장면>이다. 오랜 시간 미술계 현장에서 주목하는 화두와는 거리를 두고 목조에 전념한 백연수는 지금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목조(木彫)


전통 조각 재료 중에서 ‘나무’는 특이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나무는 ‘살아 있는 재료’라고도 하는데 조각 재료 중 유일한 유기물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베어진 순간 죽지만, 오랜 시간 건조하지 않으면 갈라지며 터지고, 심하게 뒤틀리기까지 한다. 완성해도 공기 중 수분을 흡수하기도 하고 내뱉으며 계속해서 반응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며 생기는 ‘나이테’와 ‘옹이’ 때문에 작가는 그 어느 재료보다도 많은 제약을 감내해야 한다. 그만큼 작가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재료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한 나무가 자란 모양이 제각각이라 조각할 수 있는 형태도 적지 않은 제약이
있다. 이러한 제약들 때문에 작업하는 내내 나무와 많은 대화가 필요해서 성격이 급하면 여러모로 애를 먹는다.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말처럼 어려운 재료라 하겠다. 그 어느 재료보다도 교감하며 절충이 필요하므로 목조는 단순히 조형 행위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

 

여하튼 조각가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에 적합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특정 재료로 오래 작업하다 보면 재료의 물성(物性)에 매료되어 조각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물성의 미학’을 지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회화와 비교해서 가장 큰 차이는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첫 느낌을 지속해 가며 완성하기가 어렵다는 점과 재료의 물성 때문에 표현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백연수의 목조


백연수는 목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통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이 ‘나무 다루기가 어렵다.’, ‘나무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다.’라고 하는데 그거는 내가 주체가 돼서 나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니까 다루기가 어려운 거고, 저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아요.” 백연수 목조 작품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작품 소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초기부터 일상에서 주목한 주변 사물을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해석해 제작했다. 우연히 목조에 관심을 두게 되며 이러한 사물을 나무로 깎아 실물처럼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여느 조각 작품처럼 나무로 깎아 만든 사물은 좌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반 좌대 대신에 원목이나 좌대만 한 크기로 제재(製材)한 나무의 윗부분만 깎아서 사물을 제작했다. 따라서 작품이 좌대 위에 놓인 게 아니라, 좌대와 작품은 한 몸이다. 작품과 좌대가 하나의 나무라는 점을 확인하는 순간 재현된 대상의 실재감보다도 통나무라는 중량감이 시촉(視觸)을 새롭게 자극한다. 사물의 재현뿐만 아니라 직관적으로 조각의 형식적인 화두를 제시한 중의적(重意的)인 작업이라 하겠다.

이런 작품 중에서 특히 2015년 개인전 <I am working>에 전시한 <Work-2014>라는 제목의 연작을 주목하는 데 180x50x50cm로 제재한 통나무에 다양한 사물들을 조각해서 철제 책상 프레임 위에 일곱개를 이어놔서 마치 작업대 위에 놓인 사물처럼 전시했다. 앞서 살핀 방법으로 제작한 작품임을 확인하는 순간 무엇보다도 나무 크기에 압도되며, 기계 톱질한 거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듬지 않고 거친 흔적을 그대로 남긴 거로 봐서 재현도 중요하지만,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데 좀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고 본다. 또 다른 특징은 ‘채색’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 조각의 소재는 사람과 동물이었던 것처럼 ‘조각의 역사는 우상(偶像)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각은 입체로, 실재하는 조형(造形)예술이기 때문인데, 자연히 덩어리와 볼륨에 집중한다. 재현에 방점을 두면 작업 과정에서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는 것과 채색은 오히려 방해되어서 작업한 흔적을 말끔히 없앴다.

 

예를 들어 대리석을 선택할 때 무늬가 없는 거를 여전히 선호하고, 표면에 정질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매끈하게 간다. 서양에서 이러한 경향의 기원은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시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대리석 조각작품, 대표적인 예로 라오콘 같은 작품의 발굴이었고, 이후 ‘백색 신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조각상(彫刻像)에 채색했다는 게 밝혀졌다. 요즘 마네킹과 인형을 떠올리면 이러한 사실에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조각상에 채색하면 실재감은 더욱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상(神像)을 화려하게 장식하고자 했던 건 인류 보편적인 성향으로, 채색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20세기 들어 전위적인 조각을 시도한 일부 작가들이 작품에 착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모빌과 스타빌로 유명한 칼더(Alexander Calder)다. 조각 작품이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작품이 놓일 공간을 고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성을 중시하는 조각 작품에 채색하면 원재료의 특색은 감춰지지만, 칼더의 작품처럼 공간에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조각
작품에 채색은 양가적이다. 이 모두를 고려한 듯 백연수는 원재료가 드러나게 주로 옅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고 간혹 크레파스와 색연필로 가볍게 채색했다. 작품과 좌대가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거와 담백한 채색이 ‘백연수 목조’의 독특함이다.

디지털적 전환’, 조각, 노동, 안정


지난 세기말 디지털 멀티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며 미술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변화는 가장 먼저 회화에서 벌어졌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회화는 ‘회화의 종말’을 논할 만큼 사진술 등장 이후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이 반영되어 지난 200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제1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가 『미디어 시티 서울 2000』이라는 전시명으로 개최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노고(勞苦)의 산물’인 조각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로운 매체와 인터페이스가 개발되면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예컨대 2016년 2월 24일 광화문 광장에서 3D 홀로그램 기술을 사용한 ‘유령 집회’가 열렸는데, 경찰은 이 시위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적용 여부로 고심했던 뉴스를 기억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3D프린팅과 스캔, 그리고 컴퓨터수치제어(CNC) 가공 기술이 발전하고 융합하면서 현재 조각은 회화가 사진술이 등장할 때와 유사한 상황에 놓였다. 대표적인 예로 2004년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로보터’사는 2023년 석조(石彫) 로봇 ‘1L’을 개발해서 과거에 작가가 의뢰한 작품을 제작해 주는 장인(匠人)을 대신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웨덴의 금속 절삭 전문 엔지니어링 회사인 샌드빅이 인공지능 관련 컨설팅 회사인 The A.I.Framework와 협업으로 제작한 『불가능한 조각상』을 스톡홀름 과학기술박물관이 전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CNC 가공 기술을 접목해서 제작한 최초의 조각 작품이다. 이러한 변화로 조각은 다시 정의해야 하고, 교육과정도 개정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을 회화와 조각이 아니라, 평면과 입체로 구별하는 게 일반화되었고, 조형(造形)예술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실제 일부 미술대학에서는 전공을 통폐합하며 조형예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조소 전공 교육과정에 3D 관련 수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미술사 연구 대상도 시각 문화 전반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요컨대 조각은 더 이상 ‘노고의 산물이 아니며, 촉각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급격하게 디지털로 전환하며 펼쳐진 미술계를 바라보며 여전히 힘든 노동을 감수하며 작업하는 백연수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괘념치 않고 커다란 통나무를 앞에 두고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기계 톱질과 힘든 끌질을 계속하는 거는 그에게 노동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노고(勞苦)의 산물’인 조각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로운 매체와 인터페이스가 개발되면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예컨대 2016년 2월 24일 광화문 광장에서 3D 홀로그램 기술을 사용한 ‘유령 집회’가 열렸는데, 경찰은 이 시위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적용 여부로 고심했던 뉴스를 기억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3D프린팅과 스캔, 그리고 컴퓨터수치제어(CNC) 가공 기술이 발전하고 융합하면서 현재 조각은 회화가 사진술이 등장할 때와 유사한 상황에 놓였다. 대표적인 예로 2004년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로보터’사는 2023년 석조(石彫)
로봇 ‘1L’을 개발해서 과거에 작가가 의뢰한 작품을 제작해 주는 장인(匠人)을 대신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웨덴의 금속 절삭 전문 엔지니어링 회사인 샌드빅이 인공지능 관련 컨설팅 회사인 The A.I. Framework와 협업으로 제작한 『불가능한 조각상』을 스톡홀름 과학기술박물관이 전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CNC 가공 기술을 접목해서 제작한 최초의 조각 작품이다. 이러한 변화로 조각은 다시 정의해야 하고, 교육과정도 개정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을 회화와 조각이 아니라, 평면과 입체로 구별하는 게 일반화되었고, 조형(造形)예술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실제 일부 미술대학에서는 전공을 통폐합하며 조형예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조소 전공 교육과정에 3D 관련 수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미술사 연구 대상도 시각 문화 전반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요컨대 조각은 더 이상 ‘노고의 산물이 아니며, 촉각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급격하게 디지털로 전환하며 펼쳐진 미술계를 바라보며 여전히 힘든 노동을 감수하며 작업하는 백연수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괘념치 않고 커다란 통나무를 앞에 두고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기계 톱질과 힘든 끌질을 계속하는 거는 그에게 노동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노동이 저한테 왜 중요한 부분이냐면 우연한 기회에 나무 작업을 하게 됐지만, 중간에 다른 작업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제가 결혼하고, 애를 낳고 작업하면서 노동이라는 게 저한테는 ‘너 계속 작업을 하고 있어’, ‘나 이렇게 살아 있어’, 옆에서 누가 꽹과리 쳐주듯이 저한테는 기계 소리, 망치 소리, 그런 소음이 저를 계속 정신을 일깨워 준다고 해야 하나? ‘내가 계속 작업을 하고 있구나.’ 저의 존재감을 계속 상기시켜 주는, 되게 중요한 요소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노동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백연수는 ‘여성 조각가’로 ‘여류 조각회’ 회원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여성’ 하면 ‘경단녀’와 ‘유리천장’ 같은 용어가 떠오르듯, 현실적으로 여성이 조각가로 경력 단절 없이 활동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제약이 있다. 힘든 노동은 자신이 조각가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이다. 또한 백연수는 자신의 목조 작품의 특징인 작품과 좌대가 한 몸인 이유와 목조를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애 키우면서) 쉬지는 않고, 활발하게는 못하고, 띄엄띄엄 계속 작업했죠. 그래서 제 작품들이 붙어 있고 그런 것들이, 불안하고 이런 것들도 약간은 영향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항상 애들이 둘이다 보니까 생활이 안정돼야 하고, 안정을 추구하고 이러는 게, 작업도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잖아요. 항상 작품들이 모두 다 붙어 있고, 사각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 내가 뭔가 불안해서 안정적인 걸 계속 원하는지, 그런 형태들이 계속 나와서, 예전에는 그런 것에 대한 뭐가 있었나 보다 이 생각이 좀 들기는 하더라고요. 아무튼 나무가 눈앞에 이렇게 덩어리로 보여야 저는 안정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요즘에 다 디지털로 바뀌면서 뭔가 기록되고 사라지고 이러는데 저는 그런 거가 너무 불안하고 싫은 거예요. 눈앞에 실제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 그러니까 물질이 저는 꼭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재료가 나무라는 것이 그렇긴 한데 이게 제 노동을 제일 잘 받아주는 재료 가운데 하나인 것 같아요.” 

전환


이번 전시는 ‘지난 2년여 동안 나무와 긴 호흡으로 마주하여 진행해 온 과정의 기록’으로 ‘선택한 나무가 품고 있는 잠재적인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라고 백연수는 밝혔다. 오랜 시간 백연수는 나무로 사물을 재현했다. 몇 해 전부터 3전시실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소재로 <쌓기연구> 연작으로 새로운 탐구를 시작했다. 두루마리 화장지는 2015년 개인전에도 전시했다. 그때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사물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 전시하는 두루마리 화장지는 2015년에 소나무를 체인 톱질로 거칠게 제작한 화장지와 비교하면 훨씬 더 실재같이 세련되게 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관점이 변했다. 제목처럼 하나의 조형 단위로 삼아서 ‘쌓기 연구’를 한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여전히 재현된 사물이지만 두루마리 휴지는 이제 ‘세잔의 원기둥’처럼, ‘브랑쿠시의 난형(卵形)’처럼 환원적인 형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상(捨象)’을 거쳤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형태를 담은 대상으로 다가온 체험을 통해 조형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시 강조하지만 백연수는 나무와 씨름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백연수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일렬로 쌓거나, 둥근 첨탑 형태로 쌓거나, 바닥에 흩트려 놨다. 어떤 형태로 쌓든-이전에 작품과 좌대가 한 몸이듯, 이 연작도 쌓기가 아니라 한 나무토막에 다양한 형태의 휴지를 일렬로 깎은 것이다-나무의 형태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쌓는 방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벽에 설치한 작품은 일렬로 쌓은 작품을 켜서 해체한 일종의 변주곡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그의 말처럼 나무를 대하는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쌓아 올린 휴지 탑들과 달리 깎고 채색해서 만든 각각의 두루마리 휴지부터 원목 그대로인 나무토막이 바닥에 놓여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는 생경한 나무토막이 기대어 있다. 지름이 대략 10cm가 조금 넘고 길이는 대략 70~80cm 되는 나무토막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루마리 화장지 비례로 토막 낸 후 원래 나무 모양에 맞춰 약간 어긋나게 다시 조립했다. 또 다른 나무토막은 하얀 물감을 뒤집어썼다. 이 무리의 작품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이 주체가 되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무를 이끌어 갔다면, 이제는 나무를 존중하며 대화의 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식의 전환으로 작업에 변화는 필연적이다. 1전시실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2년여 동안 나무와 긴 호흡으로 마주하며 진행한 작품 <드러나는 것>, <끝나지 않은 장면> 연작을 전시한다. 앞서 살핀 3전시실 한쪽 구석에 있던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두 점이 이 작품을 예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2년여 진행한 신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무를 선택하는 거부터 시작해서 작업하며 나무와 타협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작업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작업하면서 변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계속해서 작업에 반영되고, 앞으로도 반영될 가능성이 열린 상태로 전시장에 놓이길 바랍니다.” 
 

그의 말처럼 나무와 끊임없이 교감하며 조율해서 제작했다. 지름이 약 70cm 되는 커다란 소나무를 전과 달리 소위 ‘생(生)나무’-벤 지 얼마 안 된 나무-인 상태에서 변형을 감수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나무에서 물이 나오고, 습한 여름에 청태가 끼기 시작했지만, 이 또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했다. 연작은 제목처럼 두 갈래로 전개됐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라는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나무 속에 있는 어떤 형상을 찾아 끄집어냈다는 거다. 하나는 통나무 안에 구와 육면체 같은 기하학적인 사물이 있고, 다른 하나는 풀잎처럼 보이는 형상과 대봉감을 만들었다. 소재로 봐서 아직은 바람과 달리 주체적으로 나무를 대하는 듯하다.

안에 기하학적인 형태를 깎아 만든 연작은 통나무 형태를 온전히 살린 상태에서 내부를 파내서 제작했다. 형체의 정확성과 놓여있는 위치를 보면 얼마나 고된 작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봉감을 소재로 작업한 작품들은 기하학적인 형태를 깎은 작품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대상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보다는 작업한 흔적을 그대로 남겼는데, 액션 페인터의 격정적인 붓질처럼, 작업하면서 변하는 감정을 작품에 남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느낌이나 감정이 완성까지 지속하기가 어려운 조각의 특성을 고려하면 힘든 도전이라
하겠다.

‘끝나지 않은 장면’,

직관의 자유를 얻기 위한 출발


‘조각은 행위이며, 촉각 예술이다.’ ‘존재(재료)는 저항한다.’ 조각의 장르적 특성은 ‘행위’, ‘촉각’, ‘물성’ 이렇게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백연수는 디지털적 전환기에도 조각을 고수하며, 재료 중에서도 유독 나무에 매진했다. 주변의 소소한 사물에서 출발해서, 점차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사상(捨象)’하며 ‘추상화(抽象化)’했다. 특히 오랜 시간 나무를 다루다 보니 이해가 깊어지며, 단순히 조각하는 재료 그 이상이 되었다.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고, 각각의 나무를 바라보며 안에 있는 형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안에서 꿈틀대는 형상은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조각은 남다른
직관에서 비롯한 상상이 필요하다. 특히 살아있는 재료인 나무를 조각하는 거는 더욱더 그러하다. 직관은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다. 직관은 논리와는 대척점에 서 있고, 근간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거다. 직관적 판단은 부조리할 수 있으며,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만큼 자유로운 판단이 가능하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규범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게 또한 인간의 속성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세기 직관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철학자들이 미술작품을 통해 철학적 화두를 풀어나간 수많은 사례는 시사하는 게 많다. 사르트르와 자코메티, 메를로퐁티와 세잔, 푸코와 마그리트, 부르디외와 칼더 등 예는 너무나 많다. 또한 18세기 유럽 철학계에서 ‘미학’이라는 분야가 대두되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관의 자유’라 하겠다. 앞서 백연수는 본인 작품이 작품하고 좌대가 붙어 있고, 사각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마디로 ‘불안에서 비롯한 안정 희구(希求)’다. 안정을 바라는 거는 인간의 속성이다. 하지만 ‘직관의 자유’를 지향하는 작가에게 ‘안정’은 족쇄라 하겠다. 작가 백연수는 몇 년 전부터 족쇄를 의심했고, 벗어버려야 함을 자각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지난 작업을 살피며, 자연스럽게 작업에 관한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전환기에 개최하는 첫 번째 개인전이다. 백연수는 이번 전시, <끝나지 않은 장면>을 통해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을 되새기며, ‘직관의 자유’를 얻기 위한 출발 선상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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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Emerging Sphere 드러나는 구체, 65x70x40cm,소나무, 2025.jpg
1.Emerging Things 드러나는 것들 ,135x65x50cm, 오동나무, 2026.jpg
1.Emerging Things 드러나는 것들, 60x60x33cm, 오동나무, 202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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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lack Forms 검은 형상들, 가변설치 , 오동나무 , 202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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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by  Yeonsu Ba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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